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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산조 ‘이영희’ 편 (3) - 국악계를 이끄는 큰 동량이 돼라
작성일 : 2022-12-06 조회수 : 1148
(이영희 ‘가야금 산조’ 中)

이영희 육성 // “이제 박귀희 선생님이나 김소희 선생님 같으신 분들은 “우리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해서 괄시도 받고 마음의 상처가 많았지만은 너는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았으니까 국악계를 이끄는 큰 동량이 돼라.” 하면서 밀어주셨어요. 그래서 결국 제가 국악협회 이사장까지 하게 된 거예요. 제가 능력이 있어서 된 게 아니라 그분들이 저를 자꾸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하다 보니까 제가 결국 국악계에서는 어른으로 하다가 지금 이 나이가 된 거죠.”



나레이션 // 다큐드라마 문화가 된 사람들.
가야금 산조, ‘이 영 희’.
제3화, 국악계를 이끄는 큰 동량이 돼라.

나레이션 // 이 프로그램은 국립무형유산원에서
구술 채록한 자료를 바탕으로
EBS가 오디오 자서전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한국민속예술단의 뮌헨 올림픽기념 해외공연>
#1. 1972년, 독일

(공항 소음)

단장 // (외치는) 한국민속예술단 여러분, 드디어 서독에 도착했습니다.
저희는 앞으로 4개월 동안 24개 나라를 다닐 겁니다.
자자, 모여서 단체 사진 찍고 갑시다!

(이영희 가야금 연주 中 (행복했던 시기 회상))
80대 영희 // 여든이 넘어 50여 년 전 이야기를 하자니 미소가 지어집니다.
국악예술학교에 몸담았던 20여 년은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지요.
특히 국악계 여러 어른들과 해외 공연을 갈 때면
집에 돌아오기 싫을 정도로 좋았어요.
1972년 뮌헨올림픽 기념 해외 공연 이야기부터 들려드리지요.


(박귀희의 가야금 병창 ‘제비노정기’)
(관객들 환호와 박수 소리)
30대 영희 // 박귀희 선생님, 잘하셨어요. 오늘 제일 좋았어요.
박귀희 // 그래, 괜찮았어? 해외 오니까 소리가 더 잘 터져!
30대 영희 // 이제 김소희 선생님 차롄가 봐요.
선생님, 이거 드시고 목 좀 축이세요.
김소희 // 고맙네. 어딜 가도 이 선생이 막내 노릇을 해.
살뜰히 챙겨줘서 든든해!
박귀희 // 형님, 우리가 이제 이 선생을 밀어줄 차례 아니오.
김소희 // 아휴 그래야지. 됨됨이 좋고 많이 배운 사람이 국악계를 이끌어야지.
30대 영희 // 감히 제가 어떻게요. 전 선생님들 모시는 지금이 좋아요.
어, 이제 무용수들도 준비하네요.
이제 김소희 선생님, 나가셔야 해요.

(김소희의 ‘강강수월래’)
이영희 육성 // “김소희 선생님이 무용수들이 강강수월래를 하기 전에 무대로 쭉 나오시면서 소리를 하셔요. 소리를 쭉 하시다가 이제 정중앙에서 강강수월래를 하는 무희들을 유도해서 공연할 수 있게끔 소리를 하셨죠. 굉장히 호응이 좋더라고요. 자기들은 생소한 예술이잖아요? 그러니까 동양의 조그마한 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려니 생각했는데, 그 공연 내용이 훌륭하다는 걸 느끼는가 봐요. 굉장히 반응이 좋았어요.”


(공연장 소음)(공연 끝나고 웅성 웅성하는 소리)
파독 광부 // 저, 선생님, 혹시 가야금 하시는 이영희 선생님 아니신가요?
30대 영희 // (놀라며) 네, 제가 이영희예요.
그런데 절 어떻게 아시고 찾아오셨죠?
파독 광부 // 제 동생이 국악예술학교에 다닙니다.
오늘 저희 파독 광부들을 위해서 공연 오신다고
미리 알려주더라고요.
30대 영희 // (반갑게) 아, 그렇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파독 광부 // 제가 감사하지요. 공연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약간 울먹이며) 동생도 보고 싶고, 한국도 그립고, 울컥했어요.
저... 이거, 약소하지만 공연하시는데 보탬이 되면 좋겠습니다.

(애국가 국악 느낌으로 연주)

30대 영희 // 제자의 오빠가 건넨 봉투 안에는 독일 화폐가 들어있었어요.
거친 광산 일을 하며 모았을 화폘 보는 순간
모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어딜 가든 감동이었지요.

이영희 육성 // “스페인 갔을 때는 마요르카? 그 안익태 선생님 생전에 사시던 생가는 아니죠, 거주하던 건물 갔는데 딱 들어가자마자 부인께서 저희를 맞아주시더라고요. 현관 들어서자마자 애국가가 나오는 거예요. 한복 입고 계셨어요. 저희를 맞아주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 현관에 들어가서 이제 딱 테이블에 재떨이가 있어. 재떨이에 담배 한 반절 정도 탄 거, 재떨이 재도 있고 탄 거 있어. 안익태 선생님이 마지막에 피우시던 담배라고 그걸 치우시지 않으셨더라고요. 외국에 나갔는데 애국가를 들을 수 있다는 거. 울컥했었어요, 다들.”


<배움을 지속하며 가야금 산조 보유자가 되다>
#2. 1982년, 한국, 김영희 집

(찻잔 달그락거리는 소리)

40대 영희 // 박귀희 선생님, 차 드시죠.
박귀희 // 자주 만나도 이 선생 집에 온 지는 오랜만인 것 같아.
40대 영희 // 주로 제가 찾아뵀지요.
박귀희 // 그러게. 80년도에 학교 그만두고
벌써 2년이 지났는데, 뭐 좋은 소식 없어?
40대 영희 // 저 이번에 가야금 산조에서 보유자 후보가 됐어요.
박귀희 // 아이구, 거 잘됐어.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겠네.
에휴.. 4년 전에 김윤덕 선생이 돌아가고 나서 많이 힘들었지?
40대 영희 // 제가 이어오긴 했지만 김윤덕류 보유자가 없으니
어깨가 무겁습니다.
박귀희 // 그래~ 그래서 내가 좋은 소식 하나 주려구 왔어!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가 열리는데
나랑 같이 가서 심사하자. 난 이 선생 없이 안 간다고 했어.
40대 영희 // 네, 좋지요. 저를 매번 달고 다니시네요.
박귀희 // 달고 다니는 게 아니라 앞세우는 거야.
자네 같은 사람이 지도자 노릇을 해야지!

80대 영희 // 1980년 마흔 넘어 교직을 그만둔 후에도
선생님들과는 자주 만났지요.
특히 소리하는 이소희 선생님을 장단 선생님으로 모셨습니다.

(이영희의 가야금 연주에 장단 치는 소리)
이소희 // 어찌 저렇게 잘 흔드는고?
나보다 더 잘 하네~
어찌 저렇게 어렵게 잘 한댜~


40대영희 // (연주 멈추고) 어, 그런데 어렵게 잘한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칭찬은 아니신 것 같아서요.
이소희 // 이 선생은 하도 연습을 해서 농현이 가벼우니까,
농현을 많이 해서 가락을 만들려고 한다는 거야.
그런데 농현을 자꾸 만들려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제대로 된 음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조심해야지.
만들어진 농현 말고, 몸에서 쏟아지는 자연스런 농현을 해야지.

(이영희의 가야금 산조)
이영희 육성 // “나를 그 가락을 좀 가르쳐줘보래. 그 소리를 한번 내보겠다고. 그러면서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나누고 그 양반이 농현 하는 그 모습을 보니까 이때까지 내가 하던 그 농현 모습이 아니더라고. 그 가락을 나를 좀 가르쳐 달라고. 그래서 이 가락을 어떻게 하면 좋겠어, 그러면 당신이 그거를 표현을 해. 표현하는 그 모습을 보니까 내가 항상 얘기하듯이 내 상체 무게를 온전히 손끝으로 옮겨서 이 팔의 무게로 인해서 흔들리는 율동, 그 자체가 농현이더라고.
그래서 그분의 농현 하는 방법을 보고서 ‘아, 이거구나’.”


#3. 2013년, 이영희의 집

(현관문 열리는 소리)

이진원 // 안녕하세요? 이영희 선생님. 한예종의 이진원 교숩니다.
문화재청에서 의뢰받아 실태 조사하러 왔습니다.
70대 영희 // 어서 오세요. 보유자가 되고 벌써 20여 년이 흘렀네요.
잘하고 있나 보러 온 거지요? 맘껏 물어보세요.
이진원 // 엄한 선생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가야금 산조를 제자들에게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영희의 가야금 산조)
70대 이영희 //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가르치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몸 푸는 훈련을 시킵니다.
완전히 나를 내려놓은 훈련, 그게 첫째예요.
이진원 // 아, 저도 탁구를 배우는데, 몸 푸는 거만
3년 걸린다는 얘기들을 하더라구요.
70대 이영희 // 에구, 3년이면 좋게요? 30년을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죠.
이진원 // 그렇군요. 그럼 몸을 이완시킨 다음엔 뭘 가르치시죠?
70대 이영희 // 내 왼손에 내 몸의 모든 무게를 옮기는 훈련을 하지요.
그리고 그다음엔 악보가 원하는 흐름을 가르쳐요.
일요일엔 이수자들 전체를 놓고 가르치거든?
제가 김윤덕 선생님한테 배운 것처럼 악보 없이 가르칩니다.
이진원 //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난 12년 동안 국악협회 이사장으로서
잘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70대 이영희 // 하라니 그저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이사장 된 것도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준 어른들 덕분이지요.
이진원 // 이젠 이 선생님이 젤 큰 어른이시죠. 계셔서 든든합니다.

이영희 육성 // “국악협회 이사장을 제가 몇 살에 됐나. 어쨌든 일찍 됐어요. 60살인가. 세 번을, 12년을 하고 나서 맨 처음에는 제가 보궐로 해서 한 달 모자란 4년을 했고, 그다음에 4년, 4년 해서 12년 한 거예요. 전국적인 조직이기 때문에 각 도마다 지회, 또 지회 밑에 지부가 많았어요. 그러니까 그런 데를 다 총괄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지회를 주로 총괄하다가 지회는 그 밑으로 지부를 또 운영하게 되고 그래서 행사 있을 때마다 제가 다 참석해야 되니까 무척 바쁘게 돌아다녔죠.”


<참 좋은 사업이 아니었나-입양아, 강사풀제, 장학금 등>
#4. 2003년, 미국 덴버

80대 영희 // 2000년에 국악협회 이사장이 되고서 가슴에 남는 일이
하고 싶었어요. 마침 대학 친구 심현숙이가
미국에서 입양아들을 위해 일하고 있었지요.

친구 // 영희야,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될 것 같아. 그들의 상처를 우리 한국인들이 보듬어줘야지.
혹시 미국서 국악 공연이나 교육이 가능할까?

(비행기 착륙하는 소리)
80대 영희 // 국내외 입양기관들과 연결해서 미국의 덴버로 갔습니다.
국악인 20여 명이 함께 해줬어요.

(풍물놀이)
이영희 육성 // “로키산맥 속에 있는 YMCA 캠프장이 있었어요. 여기 다 입양아들이 다 거기 모아가지고서 캠프를 했거든요. 엄청난 숫자예요. 그래서 2003년부터 미네소타도 가고, 또 호주 멜버른도 가고 또 구라파의 스웨덴, 그런데 계속 해마다 세 군데를 다니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도를 했어요. 여러 방면으로 여러 가지를 가르쳐요. 춤도 가르치고 노래도 가르치고 놀이도 가르치고 음식 만드는 법도 가르치고.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가르쳐야 할 소도구나 꽹과리, 소고, 단소, 피리 그런 걸 우리가 다 준비해가지고 가요. 그리고 부채춤 같은 것도 부채 같은 거 다 사가지고 가서 공연하고 다 가르치고 주고 오고 하면 그 악기 가지고서 자기들이 계속 연습하고 즐기고.”


80대 영희 // 우리가 간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어요.
팔에 담뱃불 흉터가 많은, 까만 눈동자의 아이를 데리고
미국인 엄마가 찾아왔지요.

(이영희의 가야금 산조(자진모리))

미국 엄마 // (울면서) 선생님!!
노년 영희 // 왜 우세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미국 엄마 // (울먹이면서) 선생님, 저희 아이가 저 보고
처음으로 ‘엄마’, ‘엄마’라고 불렀어요.
십 년 만에 ‘엄마’란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벅찹니다.
우리 아이의 모국이 이렇게 훌륭한 예술을 가진 나라라는 걸
저도 이제야 알게 됐어요.
우리 아일 위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 울먹이면서)

80대 영희 // 저도 같이 울었습니다.
협회 이사장 하면서 힘든 것이 다 사라지는 순간이었지요.
운영이 어려울 때마다 잘했다고 격려해주고, 지지해주는 분들
덕분에 제가 그 자리를 12년이나 지켜왔나 봅니다.


제자(여) // 선생님, 장학금 주셔서 덕분에 등록을 했어요.
김윤덕류 잘 이어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영희의 가야금 산조)
이영희 육성 // “국악 하는 학교들이 다 없어지고, 더군다나 가야금 하는 인구가 자꾸 줄어드니까 이렇게라도 좀 더 보급시키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이렇게 사업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제가 무슨 큰돈이 있어서 한 게 아니고, 그저 조금 있는 거 가지고 시작한 거죠. 저는 돈 쓸 일이 없어요. 보시다시피 화장도 안 하지. 그렇다고 의복도 화려하게 입지 않지. 그저 입는 그대로 입고 먹고사니까 먹고사는 거 빼고 나머지 있는 거 다 저런데 쓰면 보람이 있잖아요.”


나레이션 //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에 위치한 170여 평 토지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예능전수교육관이 세워질 예정입니다.
그 땅은 난방도 틀지 않고 아끼며 모은
이영희 보유자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 마무리 코너 – 덧붙이는 이야기 >

(징소리)

나레이션 // ‘덧붙이는 이야기’

(이영희 ‘가야금 산조’ 중 ‘단모리’)
나레이션 // 여러분은 지금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이영희 보유자가 연주하고 ‘자진모리’ 장단을 듣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술가이자 교육가, 행정가로서의 이영희 보유자의 삶을 만나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걸어온 길에 대한 국악계의 평가를 전남대학교 국악학과 이용식 교수로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이용식 // 저는 이영희 선생님을 사실 가야금 산조 인간문화재보다도 더 우리 국악계에 큰일을 하신 부분이 교육과 행정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국립전통문화예술학교, 그 당시에 국악예술고등학교가 만들어졌을 때 교사로 가시면서 우리나라 음악계의 그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60대, 70대 연주자들이 대부분 이영희 선생님 밑에서 교육을 받으시면서 그런 물론 음악적인 교육도 굉장히 중요했었지만 이영희 선생님을 통해서 그런 어떤 우리 국악인들이 가져야 될 자세, 태도, 가치관 이런 것들을 형성하는 데 이영희 선생님이 굉장히 큰 족적을 남기셨고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행정가로서의 그런 족적도 저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이영희 선생님께서 이제 국악협회장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통해서 행정가로서 굉장히 많은 일을 하셨는데 사실 ‘내 예술이 중요하지 뭐가 중요해?’ 이런 생각들을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영희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행정가로서 그런 국악이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던, 국악이 굉장히 사실 어느 정도 활성화될 수 있었는데 이런 데 굉장히 중추적인 행정가로서의 역할을 하신 게 이영희 선생님이셨어요. 놀라운 통찰력과 기획력을 갖고 그것들을 행정으로 그렇게 몸소 옮겨서 뚝심 있게 할 수 있었던 그런 힘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사실 지금의 국악계가 만들어졌다고 저는 생각을 하거든요.


나레이션 // 다큐드라마 문화가 된 사람들,
가야금 산조, 이 영 희. 세 번째 시간.
지금까지 극본 김정인, 연출 권윤혜,
출연 홍소영, 전해리, 오민혁, 한만중, 이한솔, 류지아, 김단,
음악 윤아성, 음향효과 이용문, 기술 조성도였습니다.

나레이션 // 이 프로그램은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의 제작비 지원,
국립무형유산원의 자료 지원으로 EBS가 기획, 제작하였습니다.
요약정보

세계 각국의 해외공연을 통해 한국문화를 널리 알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평생을 애쓰며 가야금산조의 전승에 크게 이바지한 가야금 산조 보유자 이영희의 생애를 담은 오디오 다큐드라마.

* 국립무형유산원의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채록사업’에서 확보한 자료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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